변화가 시작된 자리
제 뉴스레터를 오래 읽어오신 분들이라면 최근 글의 결이 조금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으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제 개인적인 변화가 글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그 배경을 허심탄회하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지난 몇 달간 저는 일종의 격동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대부분 인공지능, 그리고 그 기술의 가속에서 왔습니다. 저는 GPT-3가 등장했을 때부터 가벼운 번역이나 실험용으로만 사용해왔고, 당시의 성능으로는 글쓰기나 사유 방식에 실질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GPT가 5.1까지 도달한 지금의 변화는 기존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기술이 아니라 환경 자체가 바뀐다는 느낌에 가깝습니다.
인문학적 작업은 안전할 것이라는 착각
오랫동안 저는 인문학적 독서와 글쓰기의 영역만큼은 AI가 쉽게 침범하기 어렵다고 생각해왔습니다. 하지만 최근 집중적으로 실험해보니, 그 생각이 지나치게 순진했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육체노동이 아닌 거의 모든 종류의 지적 작업은 이미 AI의 영향을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했고, 글쓰기도 예외가 아닙니다.
저는 2000년대 초반의 인터넷 버블을 몸으로 겪었기 때문에, 이번 AI 열풍도 또 하나의 버블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기술을 계속 익히고, 환경 변화에 적응하는 부담을 견디고 싶지 않았던 것이겠죠. ‘지금 하는 일을 더 잘하면 된다’는 익숙함에 머무르고 싶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변화는 외면할 수 있는 종류의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뒤처질 수 있다는 두려움과 가능성의 발견
AI를 실험하면서 동시에 두 가지 감정이 생겼습니다. 시대에 뒤처질 수 있다는 두려움, 그리고 AI를 활용하면 지금 하는 일을 더 잘할 수 있다는 희망. 특히 후자는 예상보다 강하게 찾아왔습니다. 제가 해왔던 공부가 AI 시대의 작업 방식과 이상하리만큼 잘 맞물린다는 사실도 확인하게 됐습니다.
이런 확신의 단초는 뜻밖에도 한 연구에서 왔습니다. 2023년 Microsoft Research의 〈Textbooks Are All You Need〉입니다. 연구의 결론은 간단합니다.
"잡다한 웹 데이터보다 고품질의 ‘교과서 데이터’로 학습한 AI 모델이 훨씬 더 잘한다."
양보다 질이라는 이 결론은 AI를 벗어나 인간의 학습 방식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잘 만들어진 교과서로 공부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능가하듯, 모델도 그와 동일하게 작동합니다.
AI와 함께 일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저는 AI에게 다양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방대한 정보를 쏟아냅니다. 그중 사실 여부가 모호한 부분을 추려 다시 질문하고, 또 다시 질문하며 하루를 보내다 보면 얇은 책 한 권을 읽은 것만큼의 텍스트를 훑고 있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점점 더 명확해진 사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 무엇을 모르는지 스스로 파악해야 한다.
- 질문을 정확히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
- AI가 제공한 정보를 검증하고, 신뢰와 의심을 동시에 작동시키는 판단력이 필요하다.
- 그대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내 목소리와 의도에 맞게 재구성하는 주도권이 필수다.
요약하자면, AI를 잘 쓰는 능력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대신해주는 기술이 아니라, 더 치밀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힘을 실어주는 기술에 가깝습니다.
연결의 기술, 사고 실험의 확장
최근에는 전혀 다른 두 개념을 AI에게 연결해보는 시도를 자주 합니다. 예를 들어, 대규모 언어 모델(LLM)의 핵심 구조인 트랜스포머(Transformer) 아키텍처와 조지프 프랭크의 ‘공간적 형식’을 비교해보라고 요청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가진 지식만으로는 이 둘의 연결 지점을 설계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AI와 함께 사고 실험을 해보니 의외의 통찰이 생겼습니다. 전혀 다른 두 사유가 충돌하며 드러나는 공통 구조가 있는지 탐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에게 AI는 ‘답을 주는 도구’라기보다 ‘예상치 못한 연결을 탐색하게 하는 새로운 사고 장치’에 가까워졌습니다.
AI는 글쓰기를 대체하는 존재가 아니라, 글쓰기를 압도적으로 어려운 활동으로 되돌려놓는 존재입니다. 무한한 정보가 눈앞에 펼쳐지는 시대일수록, 어떤 질문을 던지고 무엇을 선택하며 어디를 의심할지 결정하는 일은 더욱 인간의 몫이 됩니다.
저는 지금 제 작업 방식과 사고 구조를 현실에 맞게 다시 점검하고 있습니다. 변화 자체를 과도하게 해석하지 않되, 무시하지도 않으려 합니다. 앞으로도 AI를 활용하며 얻은 관찰과 시행착오를 이 공간에서 차분히 공유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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