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또는 오물 투척을 막아내려면 네가 알아서 해주면 내가 할 것이 더 많아지는 역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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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즘 AI와 대치중입니다. 이세돌 바둑 기사가 알파고로부터 1승이라도 거둘 수 있었던 그 한 수 같은 것 — AI는 쓸 수 없는 어떤 것이 하나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세돌 기사 같은 '천재'도 아니고 그만큼 노력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찾진 못 하겠죠.
책을 요약하고 소개하거나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AI를 사용하는 사람들 앞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클로드와 제미나이를 이용해서 "허구와 실제 정보, 인용, 책 등이 결합된 글을 쓰기 위해 알아야 할 역사, 정보, 자료 등을 정리"했습니다 — 라고 하기에는 딜레마가 있습니다. 저에게는 "했습니다"라고 능동태를 쓸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단 몇 줄의 요청만 했을 뿐이고, 몇십 달러의 구독료를 내곤 있지만 그것이 결과물의 주인 행세를 할 자격까지 주진 않죠. 그렇다고 해서 '~에게 시켰다'라고 표현하며 AI를 의인화하는 것은 유치하면서 비윤리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에 꺼려집니다.
아무튼 그 '요청'으로 클로드와 제미나이를 오가며 '허구와 실제의 융합, 그리고 상호텍스트성의 미학', '허구와 실제의 융합 지형도'라는 제목의 결과물이 만들어졌습니다. 클로드의 '연구', 제미나이의 'Deep Research'를 이용해서 일종의 '맞춤형 논문'을 만든 건데, 종종 다 읽기 힘들 정도로 많은 분량으로, 어렵게 만듭니다. 이번에도 만만치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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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투척(info-dumping)'이라는 말이 있더군요. '자신이 조사한 것을 과시하려는 욕구'라고 하던데, 저도 예외는 아닌 것 같네요. 그런데 이게 꼭 잘난 척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은 나누고 싶은 마음도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다보면 지나친 글, 망친 글이 되는 거죠. 좋은 의도가 항상 좋은 결과로 이어지진 않으니.
AI를 개인 지식관리에 적용하는 도구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저처럼 옵시디언에 각종 정보, 지식 문서를 저장한다고 했을 때 그 문서들을 관리하고, 연결하고, 계속 업데이트해서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내는 걸 도와주는 AI 도구인 거죠. "투척"된 정보를 AI가 '알아서' 지식으로 만들어 주는.
저도 처음엔 솔깃했습니다. 그런데 좀 쓰면서 생각해보니, AI가 '알아서' 해주는 그것들을 내가 모두 소화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생기더군요. 만약 알아서 해준 바로 그 과정이 내가 지식을 쌓는 데 필수적인 과정이라면 제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그냥 내 컴퓨터에 뭔가 잔뜩 쌓여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을 수 있을 뿐이죠.
이젠 모두 많은 게 문제입니다. 아까 그 보고서 같은 것을 한 번 읽으면 읽어야 할 책과 자료가 금방 쌓입니다. 당면한 관심사를 주제로 만든 보고서이기 때문에 집중해서 읽게 되고 연관성은 더 강하게 느껴집니다.
이번 같은 경우도, 아니 에르노(Annie Ernaux)의 《칼 같은 글쓰기》만 우선 읽자, 라고 했다가 매료되어 버렸습니다(역시 당면한 관심사이기 때문에 더 강하게). 그리고는 그의 책 네 권(단순한 열정, 집착, 밖의 삶, 바깥 일기 — 다행히도 모두 100페이지 안팎의 얇은 책들입니다)을 주문했습니다. 아직 흐릿하지만 지금 내 생각과 연결되는 것이 있고, 더 알고 싶다는, 그러다보면 '결정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희망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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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같은 적독가(積讀家)들에게 반가운 일도 생깁니다. 보고서에서 몇년 째 읽지 않은 책을 언급할 때가 그렇습니다. 그 책을 왜 샀는지도 이젠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이 보고서에서 필수적인 책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어디에 꽂혀 있는지 책장에서 한참을 주섬주섬 찾은 책이 두 권, 《사이버텍스트》와 《드 보노의 수평적 사고》입니다. '그거 봐. 사두면 언젠가는 읽는다니까'라는 말이 합리화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는 또 책을 사겠죠.
다시 말하지만, 많은 게 문제입니다. 번역을 쉽게 할 수 있다보니 번역해서 저장해 놓은 글이 쌓여가고, 많은 정보 덕인지 탓인지 사고 싶은 책도 많아집니다. 그러나 밖의 오물들이 내 컴퓨터에 쌓이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냥 놔두면 그 오물들이 내 머릿속으로까지 넘쳐들어올 게 뻔해 보이니까요.
오늘 책을 읽다가 갑자기 어떤 느낌과 이미지가 스쳐가면서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마음, 정신이 좋은 지식과 서사로 다져져서 유연하면서도 단단한 그런 사람. 이 이미지를 자주 떠올려 봐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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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tricia Salas, 'Puerto Montt' (1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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