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마뉘엘 카레르, 《필립 K. 딕》 (2022)
에마뉘엘 카레르, 《필립 K. 딕》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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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K. 딕에 대하여
필립 K. 딕(1928~1982)은 미국의 SF 작가이다. 살아있을 때보다 죽은 후에 더 인기를 끌었는데, 아마도 그의 많은 작품이 헐리우드에서 영화로 — 〈블레이드 러너〉, 〈토탈 리콜〉, 〈스크리머스〉, 〈마이너리티 리포트〉, 〈임포스터〉, 〈페이첵〉, 〈스캐너 다클리〉, 〈넥스트〉, 〈컨트롤러〉 등 — 만들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SF에 대한 그의 공헌을 기념하기 위해 '필립 K. 딕상(Philip K. Dick Award)'이, 그가 사망한 다음 해인 1983년에 만들어져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최근 정보라 작가가 '세계 3대 SF상'인 이 상에 후보로 올라 화제가 됐었는데, 과연 필립 K. 딕상이 세계 3대 SF상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보통 세계적 SF 문학상이 휴고상(Hugo Award)과 네뷸러상(Nebula Award)이라는 데는 반론이 없지만, 세 번째는 — 세 번째가 항상 문제다 — 로커스상(Locus Award)이라는 사람도 있고, 세계환상문학상(World Fantasy Award)이라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후자는 SF보다는 판타지 문학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휴고상, 네뷸러상, 로커스상을 세계 3대 SF상으로 보는 의견이 우세한 것 같다.
그러므로 필립 K. 딕상을 세계 3대 SF상에 포함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 오히려 이 상은 — 바로 딕의 소설처럼 — 대안적 SF를 지향한다고 알려져 있고, 《너의 유토피아》가 후보에 오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그만큼 '필 딕'이 SF 문학에 미친 영향과 차지하는 위상은 지금까지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다. 그의 작품은 SF를 포함해 다른 어떤 문학과도 달랐고, 인간으로서는 누구와도 같지 않았다.
태어나자마자 굶어죽은 쌍둥이 누나(또는 여동생)로부터 시작되는 편집증, 과대망상, 피해망상, 각종 약물 중독, 호색한, 거듭되는 결혼과 이혼, 다변증, 몇 번의 자살 시도 등 이 모든 것을 한 명에게서 찾을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도 힘든, 그러면서도 종교와 영혼을 파고들었고 생계를 위해서이긴 했지만 다작(多作)을 이어간, 복잡하고 엉망진창이며 끈질긴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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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작가는 자기가 말하는 것을 믿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이 얼마나 혼란스러워지겠어요?" (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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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이렇게 했지만, 결국 자신의 말을 스스로 믿음으로써 세상이 아니라 자신을 죽을 정도로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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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마뉘엘 카레르에 대하여
필립 K. 딕의 평전인 이 책을 쓴 에마뉘엘 카레르(1957~)는 "문학적인 저널리즘식 글쓰기로 탁월한 역량을 인정받은" 프랑스 작가이다. "전기 작가로도 탁월한 카레르는 어릴 적부터 영향을 받은 SF 거장 필립 K. 딕의 인생을 모든 소설 기법을 사용하여 새로운 평전으로 발표하였다."(지은이 소개 중)
처음 알게 된 작가인데 국내에는 이미 그의 책들이 많이 번역되어 나왔고, 모두 '열린책들'에서 출간했다. 《필립 K. 딕》 원서는 1993년에 나왔으니, 카레르의 작품 활동 초기, 그가 36세에 집필한 책이다.
- 《콧수염》 (1986/2001)
- 《필립 K. 딕》 (1993/2022)
- 《겨울 아이》 (1995/2001)
- 《적》 (2000/2005)
- 《러시아 소설》 (2007/2017)
- 《나 아닌 다른 삶》 (2009/2011)
- 《리모노프》 (2011/2015)
- 《왕국》 (2014/2018)
- 《요가》 (2020/2023)
이 중 읽고 싶은 책들은 《적》, 《왕국》, 《요가》이다. 작품 내용을 대략적으로 요약한 글을 통해 선택하게 된 것인데, 이상했다. 《필립 K. 딕》에서 봤던 주제나 소재들이 카레르의 책들에도 등장하고 있었다.
- "아동기의 불안과 상상, 현실 경계" — 《겨울 아이》
- "사실과 허구의 경계, 인간 내면의 어둠을 탐구" — 《적》
- "본인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로, 자기 고백적이고 공감력을 확장하는 시선" — 《나 아닌 다른 삶》
- "카리스마 넘치는 실존 인물을 통해 20세기 격동의 시대를 조명" — 《리모노프》
- "초기 기독교를 탐구하는 방대한 팩션" — 《왕국》
- "내면의 상처와 회복, 자기 성찰을 더욱 깊게 탐구" — 《요가》
내 억측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남겨두고 말하자면, 이 면모들은 《필립 K. 딕》에서도 여러 서사들을 통해 분명히 나타난다. 여기서 몇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 《필립 K. 딕》은 어디까지가 사실인가?
- 이 책은 이후 카레르 작품 주제의 단초가 되었나?
- 카레르는 이 책이 "전기"라고 밝히고 있지만, 과연 전기, 평전이 맞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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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의 주요 정보원(情報源)은 딕의 작품들이었고, 증인들의 증언과 나의 상상에서 나오지 않은 모든 것은 거기서 얻었다." (5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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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의미심장하다. 카레르 자신의 상상은 물론이고 딕의 작품에 대한 '자신의 해석' 역시 책에 포함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심증들은 카레르의 책들을 읽은 후에나 의미가 있는 것일지 판명될테니 그때까지 남겨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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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아 있고, 너희는 죽었다"
이 책의 부제, "나는 살아 있고, 너희는 죽었다"는 딕의 장편 중 하나인 《유빅》에 나오는 말이다. 이 상황은 SF나 환상 문학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꽤 익숙한 장치이다. 내가 지금 현실로 느끼고 있는 이곳이 사실은 적이 만든 환상이라는 함정인 것이다. 그리고 진짜 현실에 있는 누군가가 너희는 지금 거의 죽은 상태로 환상에 빠져있다는 것을 여러 방법을 통해 알려주려고 한다. 영화 〈매트릭스〉를 떠올리면 금방 알 수 있는데, 이 역시 딕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딕은 이것을 '실제로' 받아들였다. 자기가 말한 것을 믿어 버린 것이다. 카레르가 이 문구를 부제로 삼은 이유도 그것이다. 아마 이 책을 다 읽은 후에 가장 먼저 읽고 싶은 딕의 책은 《유빅》일 가능성이 크다.
필립 K. 딕에 관해 알고 싶어 읽기 시작했지만, 에마뉘엘 카레르라는 또 다른 대단한 작가를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죽은 자와 산 자, 딕과 카레르가 함께 쓴, 평전이면서 픽션이면서 논픽션이기도 한, 여러 번 표지를 쓰다듬고 싶은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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